의종은 인종과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.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어머니는 그보다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유난히 좋아해 그를 태자로 앉히려고 했지만 정습명의 강력한 지원으로 그러지는 못했다.[3]1143년에 태자(太子)가 되었으며[4]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했다.[5]
즉위한 뒤에 그는 아버지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, 묘청의 난 등으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. 더욱이 재위 초반에는 몇몇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연계해 국가전복을 꾀하려다 사전에 들통나 처벌받는 등[6]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. 그래서 무신들을 등용해 친위군을 강화해 나갔다. 이 과정에서 정중부, 이의방, 이고, 이의민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.
왕광취, 백자단 등 측근 세력의 폐단이 커지자 의종은 이들을 견제하고자 김돈중, 이공승 등 문벌 세력을 등용하고자 했으며, 이는 무신들이 의종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. 게다가 김돈중의 유시(流矢) 사건으로 애먼 군인들이 처벌받자[15] 무신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의종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박탈심을 느꼈고, 지배 세력이 내시, 환관 등의 측근에서 문벌 귀족으로 바뀌더라도 자신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. 이 위기의식이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.[16]
그 뒤 1173년에 김보당(金甫當)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시고 경주로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.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진압되었다.[18]
1173년, 의종은 자신이 발탁했던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(坤元寺)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그가 의종을 끌어안고서는 등뼈를 꺾어버린다. 그리고 온 몸의 마디, 관절을 부러뜨려 버리고 의종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. 시체는 그대로 동경 (오늘날 경주)의 한 연못에 수장당하고 만다.[2]
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아우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(禧陵)이다.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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